< 남고산성 >
조선시대 산성, 사적294호,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성
전주남방, 남고산(南固山)의 자연 형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석성이다. 즉 골짜기를 안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남쪽으로는 고덕산으로 이어지며 동북쪽으로는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 라고 여겨지는 전주성(동고산성)과 마주 보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훼손된 부분도 천경대에서 만경대 억경대 북장대에 이르는 부분은 최근에 복원 되었으며 서북변을 자연 규암층을 잘 이용하고 있다. 성곽 전체는 대체적으로 사다리 꼴을 이루어 서쪽 성벽과 북쪽 성벽은 전주시가지와 전주천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전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주 제일읜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에 동쪽 성벽과 남측성벽은 고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어 고덕산 등산로 또는 가벼운 산책 코스로 많이 이용된다.
성문은 남고사를 통하는 곳에 있는 서문지와 동측 성벽에 있는 동문지가 있고, 그 외에 서문암지와 동문암지 등의 비상통로로 이용한 3개의 암문이 있고 전주부사(全州府使)의 남고산성 조감도에는 지금 삼경사 입구 쪽에 수구와 서암문 사이에 남문이라 명기하고 홍예문에 초루까지 그려진 것을 보면 조선 말기에는 남문도 설치되었던 듯하다.
[세종실록]지리지 전주부 조에 ‘고덕산석성은 둘레가 1413보이고 7개의 우물이 있고 계곡엔 겨울과 여름에 물이 마르지 않는다’ 라고 쓰여있으며, [동국여지승람] 전주부 고적(古跡)조에 ‘ 고덕산성 석축 둘레가 8920자 높이가 8자 우물7개 계곡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그 외에도 [선조실록]-권88 30년5월 정사조(丁巳條) 및 동30년 11월 기록에도 언급되어있다. [문헌비고]에도 고덕산성 기록에 전주 남쪽 7리에 주위가 8920자의 석축성이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을 다시 수축(修築)하여 남고진을 둔 것은 선조13년(1813)이다. [대동지지] 에는 전주 남쪽5리 고덕산에 남산성이라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순조13년 주위 2693보, 포루 4, 동서2문, 암3문, 우물 7, 방죽 2, 계곡 1개 가 있으며 수성장(守城將)으로 본부 판관겸 별장1인, 승장 2인, 절 4, 창고 2채가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산성 수축경위는 [남고산성 사적비]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산성에는 관왕묘(관제묘, 관성묘)가 고종32년(1895)에 건립되어있고 만경대에는 포은 정몽주의 이른바 망향가와 반옹, 윤상진, 나학경, 이서구, 지포 박윤수 등 6인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이들 암각 글씨는[남고산 사적비]를 쓴 창암 이삼만의 글씨와 같아서 그가 새겼다고도 하고 혹자는 영조22년(1742)애 진장 김익수가 새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 >
조선 기타비, 완산구 도성학동 산 228
얼마전까지 시내에서 남고사로 들어가는 남고산성 서문 성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그러나 최근 문호재 보호차원에서 비각을 세우면서 성곽 안쪽으로 5~6M 옮기고 비각을 지어 그안에 잘 보존하고 있다.그런데도 현장을 취재하지 않은 모지방지엔 몇 년전에 찍은 성벽위의 사적비사진을 버젓이 올려놓는 대담한 뱃장을 보이고 있다. 헌종 12년(1846)에 세운 비석으로 남고진 설치와 산성보수 내력이 기록돼 있다. 비문의 내용은 ‘전주부성 남쪽 남고산에 견훤의 고성터인 남고산성이 있는데 이곳에서 만마관(지금 남관 죽림 온천지나
슬치에 가장 가까운 오른쪽 주유소로 추정됨)까지는 사슴 뿔처럼 첩첩 산줄기로 이어진 천혜의 요새로 임진왜란때 소모사 이정난이 전주성을 지키되 외각지세(사슴 뿔처럼 양 옆으로 겹겹이 진을 쳐 방어하는 진법)을 베풀어 왜적이 처 들어 올 수 없도록 하였다. 영조 10년(1734) 관찰사 조현명이 완산부성을 증축 한 후에 여기에 산성을 다시 쌓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임기가 만료되어 떠나고 순조11년(1811)에 관찰사 이상황이 수축을 시작하여 후임으로 부임한 관찰사 금풍군 박윤수에 의해 남고진이 완성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비문은 최영일이 짓고 당시의 추사 김정희에 버금가는 이고장의 명필 창암 이삼만이 글씨를 썼다. 비신의 크기는 54×130×27㎝이다.
< 남고사(南固寺)와 남고사지(南固寺址) >
삼국시대 사지 지방 기념물 72호, 완산구 동서학동 2가 724(남고산성 남고사길 77)
남고사는 남고산성 내에 있는 사찰로 「동국여지승감」에 「남고사 재 만경대후-南高寺在萬景臺後」라 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 전기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문무왕 8년(668)에 보덕화상의 수제자 명덕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 제3권 보덕이암(普德移庵)조에 「명덕창연구사-明德創燕口寺」라 되어있다. 또 조선 초 「동국여지승람」에는 남고연국사(南高燕國寺)라고 불렸다고 되어있다.(여기서 연국이라는 명칭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로 산성 사찰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남고사는 원래 연구사(燕口寺)라 했던 것을 산성과 관련하여 연국사로 바꾸어 부르다 그 뒤 남고사(南高寺)로 바뀌어 조선 성종 때 까지 불리우다가 순조 때 남고진(南固鎭)설치와 때를 같이하여 남고산성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여 남고사(南固寺)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정면과 측면의 중앙어간에는 주간포(柱間包)2좌씩, 그 밖에는 주심(柱心)과 주간(柱間)에 1좌씩의 공포를 기구하였다.
법당 내에는 나무로 조성된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아미타불 좌상과 약사불 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조선후기에 조성된 불상이다. 석가여래좌상을 육계에 나발이고 얼굴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의 각진 얼굴을 하고 있으며, 눈은 가늘게 뜨고 얼굴에 비해 코가 크게 조각되어 둔한 느낌이 들게 한다. 또한 목이 짧아 약간 답답한 느낌을 준다. 삼도가 있고 통견의 법의가 갑옷처럼 둔중한 모습이다.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을 만들어 끼워진 형태로 결과부좌를 하고 있으며, 앉은 높이 118㎝이고 무릎 폭은 92.6㎝이다.
< 만경대(萬景臺) 정몽주 우국시 각석(憂囗詩 刻石) >
조선시대 각석,완산구 동서학동 2가 724(남고산성 남고사길 77)
남고산성 서문 오른쪽 만경대에서 천경대 쪽으로 성벽을 따라 5-6m 내려가다 왼쪽으로 철책으로 막아 놓은 바위에 새겨진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우국시로 일명 망향가(望鄕歌)라고도 하고 이런 연유로 개성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만경대(萬景臺)를 만경대(望京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성계가 조선조 창업에 앞서 고려우왕 6년 (1380) 9월에 당시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운봉 황산(荒山)에서 왜구 아지발도의 무리를 섬멸하여 이른바 황산대첩의 승전보를 가지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조가 살았던 전주에 들러 종친들을 오목대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의기충천한 이성계가 한나라 고조가 한나라를 세우겠다는 큰 포부를 담아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부르자, 당시 종사관으로 동행하였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내심을 간파하고 비분강개하여 홀로 말을 달려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임금(우왕)이 계신 북쪽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이시를 영조 22년(1742) 남고진장으로 있던 김익수가 새긴 것이라고 한다. 혹자는 글씨의 체가 남고진 사적비의 이삼만의 글씨와 유사하다고 창암 이삼만이 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때 읊은 우국시는 다음과 같다.
천인강두석경횡(千仞崗頭石逕橫) ‘천길 바윗 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등임사아부승정(登臨使我不勝情)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
청산은약부여국(靑山隱約扶餘國) 청산에 깊이 잠겨 부여국을 다짐했건만,
황엽빈분백제성(황엽빈분백제성) 누런 잎은 백제성에 흩날리어라,
구월고범수객자(九月高凡愁客子) 구월의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짙고,
백년호기오서생(百年豪氣誤書生) 한평생 지닌 호기는 서생으로 그르쳤구나,
천애일몰부운합(天涯日沒浮雲合) 하늘가에 해는 기울고 뜬구름은 합해지는데,
교수무유망옥경(矯首無由望玉京) 속절없이 고개 돌려 옥경만 바라보네’
< 밤나무 >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키가 15~20m이며 열매(밤)를 얻기 위해 널리 심는데, 수피는 세로로 갈라진다. 잎은 긴 난형(卵形)으로 어긋나고 잎 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가 있다. 잎의 겉 맥은 가운데 맥에서 양쪽으로 17~25쌍이 뻗어 있다. 6~7월에 암·수꽃이 잎겨드랑이에서 미상(尾狀)꽃차례로 피는데, 암꽃은 꽃차례의 아래쪽에 3송이씩 무리지어 핀다.그러나 암꽃은 기다란 수꽃에 치어 알아보기가 힘들어 보통 암꽃이 있는지 조차 잘 모른다. 수꽃은 6장의 꽃덮이조각[花被片]과 10개 정도의 수술로 되어 있고, 암꽃은 6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씨방과 6개의 암술대로 이루어져 있다. 열매는 9~10월에 견과(堅果)로 익어 길이가 3㎝ 정도 되는 가시가 많이 난 밤송이가 되며, 그 속에 1~3개의 밤이 들어 있다.
가을에 열매를 따서 날로 또는 삶아서 먹거나 구워 먹으며, 과자나 요리에 첨가하기도 하고, 또 찹쌀·대추·잣 등과 함께 섞어 약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꽃이 필 때 수꽃을 따서 그늘에 말린 것을 율화(栗花)라 하고, 한방에서 율화는 목구멍에 생긴 연주창(連珠瘡) 치료에, 밤 껍질을 벗겨 말린 것을 건율(乾栗)이라고 하며 건율은 건위(建胃)·보신(補腎)·익기(益氣)에 쓰인다. 이밖에 민간에서는 밤을 검게 태워 참기름에 이겨 발라 탈모를 치료하고, 밤알을 달여 먹어 만성 구토와 당뇨병 치료에 사용하며, 코피가 멎지 않을 때 불에 구운 가루를 죽에 타서 먹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에는 열매의 속껍질인 보늬를 가루로 만들어 꿀과 섞어 얼굴에 바르면 윤이 나고 주름살이 펴진다고 믿었다. 불에 데었을 때 밤송이나 줄기의 진액을 바르면 효과가 있다. 밤꽃에서 딴 꿀은 밤꽃 고유의 냄새를 지닌다. 밤꽃 고유의 냄새는 남자의 정액의 냄새와 유사하여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밤나무의 재목은 물과 습기를 잘 견디므로 철도 침목, 가옥 토대, 토목 용재, 선박재, 북의 동체, 다리 건설 등에 쓰인다. 변재는 암황색, 심재는 황갈색으로 경계가 뚜렷하고 나이테도 분명하다. 재질이 강인하고 결이 곧아 잘 쪼개지는 성질이 있어 공작하기 쉽고, 가지는 말뚝으로 널리 쓰인다. 밤나무는 과수로뿐만 아니라 꽃꽂이나 조경용으로도 널리 심고 있다. 물이 잘 빠지고 양지바른 사질(砂質) 양토에서 잘 자라며, 그늘진 곳에서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건조한 기후에 강하고 토양 적응성도 높은 편이나 토양의 겨울에 동해(凍害)를 받기 쉬워 남향·남동향·동향으로 심는 것이 좋다. 밤나무는 밤나무혹벌과 같은 해충과 곰팡이에 의해 생기는 줄기마름병에 의해 큰 피해를 입는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밤나무를 심어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낙랑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밤이 나왔다고 하며, 또한 1,700년 전 중국 진나라 〈삼국지 三國志〉의 마한편(馬韓篇)에 '굵기가 배만한 밤'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부터 밤나무를 심고 밤을 식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밤, 일본밤 약밤나무등을 심고 있다. 약밤나무는 중국 밤이라 하여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널리 심었으며, 특히 평양 근처에서 많이 심어 평양 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약밤나무는 밤알이 작고 속껍질이 잘 벗겨지며 단맛이 많아 군밤용으로 적당하나,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키가 작고 밤나무 혹벌에 대한 내충성이 약해 요즈음에는 거의 심지 않는다. 한국 밤도 밤나무 혹벌FP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입은 후 이 벌레에 잘 견디는 산대율(山大栗),광주조율(廣州早栗),중흥율(中興栗) 등의 품종을 심고 있다. 일본밤은 그 재배 기원이 정확하지 않은데 어떤 학자들은 한국밤과 일본밤이 같은 종(種)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밤으로는 밤나무혹벌에 대한 내충성이 강한 품종을 심는다.
뼈아프고 고생스러운 일을 다 겪어보았다는 뜻의 "밤송이 우엉송이 다 끼어보았다"라는 속담은 가시가 있는 밤송이와 갈퀴 모양으로 굽어서 찌르는 우엉의 꽃송이에서 나온 말이다. 밤을 땅에 뿌리면 밤에서 싹이 나와 꽤 자랄 때까지 밤껍질이 어린나무 뿌리에 계속 붙어 있다고 하여, 밤나무를 근본(선조)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겨 밤을 제상(祭床)에 올린다고 한다.
위패,신위,신주,사판(位牌,神位,神主,祠版)
밤을 심으면 싹이나와 꽤 자랄때까지 밤껍질이 어린나무 뿌리에 계속 붙어 있다고하여 밤나무를 근본(선조)를 잊지않는 나무라여겨 제사상에 올린다고한다.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 중 씨가 하나인 대추는 임금을, 밤은 삼정승을,감은 육 판서를, 배는 기타 관속을 상징하기도한다.
또 밤 껍질은 알맹이가 다 삭아 없어질 때가지 변치 않고 속을 감싼채 보호해 준다. 그야말로 일편단심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간직하는 위패(位牌,神位,神主,祠版)를 밤나무로
깍는다. 그 이유는 육신은 버렸지만 영혼만은 변함없이 받들겠다는 살아있는 사람의 정표다.나에게는 누가있어 밤나무로 위패를 깍아 줄까? 살아있는 동안 밤나무에 이름이라도 새겨줄 사람 어디 없을까? 오늘 부터라도 일삼아 찾아 봐야겠다.
신주-죽은사람의 위패.일명사판, 흔히 밤나무로 위는 둥글게 아래는 모나게 만든 것으로 넓이 두치(6cm) ,길이여덟치(24cm) 정도이다.
누구에겐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존재란 없다고 밤나무는 말한다. 그가 내게 무언가 주지 않아도, 내가 그를 발견하고 느끼며 그에게 감사할 때, 그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된다고.
나는 누구에겐가 무언가를 느끼게 하고 감사하며 귀한 선물이 되는지 나는 나에게 되물어 봤으나 명쾌한 대답을 얻을 수 가 없다. 나는 밤나무처럼 선물을 줄 수 없다.
* 참고
지방(紙榜)-종이로 만든 신위(神位)
신위-신령이 의지할 자리 지반 따위
위패-단,묘,원,사(壇,廟,院,寺)에 모시는 신주의 이름을 적은 나무로 목주, 위판, 영위(木柱, 位版, 靈位)라고도한다.
조선시대 산성, 사적294호, 완산구 동서학동 남고산성
전주남방, 남고산(南固山)의 자연 형세를 이용하여 축조된 석성이다. 즉 골짜기를 안고 있는 포곡식 산성으로 남쪽으로는 고덕산으로 이어지며 동북쪽으로는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후백제 견훤의 왕궁터 라고 여겨지는 전주성(동고산성)과 마주 보고 있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훼손된 부분도 천경대에서 만경대 억경대 북장대에 이르는 부분은 최근에 복원 되었으며 서북변을 자연 규암층을 잘 이용하고 있다. 성곽 전체는 대체적으로 사다리 꼴을 이루어 서쪽 성벽과 북쪽 성벽은 전주시가지와 전주천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전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주 제일읜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반면에 동쪽 성벽과 남측성벽은 고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어 고덕산 등산로 또는 가벼운 산책 코스로 많이 이용된다.
성문은 남고사를 통하는 곳에 있는 서문지와 동측 성벽에 있는 동문지가 있고, 그 외에 서문암지와 동문암지 등의 비상통로로 이용한 3개의 암문이 있고 전주부사(全州府使)의 남고산성 조감도에는 지금 삼경사 입구 쪽에 수구와 서암문 사이에 남문이라 명기하고 홍예문에 초루까지 그려진 것을 보면 조선 말기에는 남문도 설치되었던 듯하다.
[세종실록]지리지 전주부 조에 ‘고덕산석성은 둘레가 1413보이고 7개의 우물이 있고 계곡엔 겨울과 여름에 물이 마르지 않는다’ 라고 쓰여있으며, [동국여지승람] 전주부 고적(古跡)조에 ‘ 고덕산성 석축 둘레가 8920자 높이가 8자 우물7개 계곡이 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그 외에도 [선조실록]-권88 30년5월 정사조(丁巳條) 및 동30년 11월 기록에도 언급되어있다. [문헌비고]에도 고덕산성 기록에 전주 남쪽 7리에 주위가 8920자의 석축성이 있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을 다시 수축(修築)하여 남고진을 둔 것은 선조13년(1813)이다. [대동지지] 에는 전주 남쪽5리 고덕산에 남산성이라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순조13년 주위 2693보, 포루 4, 동서2문, 암3문, 우물 7, 방죽 2, 계곡 1개 가 있으며 수성장(守城將)으로 본부 판관겸 별장1인, 승장 2인, 절 4, 창고 2채가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산성 수축경위는 [남고산성 사적비]에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산성에는 관왕묘(관제묘, 관성묘)가 고종32년(1895)에 건립되어있고 만경대에는 포은 정몽주의 이른바 망향가와 반옹, 윤상진, 나학경, 이서구, 지포 박윤수 등 6인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이들 암각 글씨는[남고산 사적비]를 쓴 창암 이삼만의 글씨와 같아서 그가 새겼다고도 하고 혹자는 영조22년(1742)애 진장 김익수가 새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 >
조선 기타비, 완산구 도성학동 산 228
얼마전까지 시내에서 남고사로 들어가는 남고산성 서문 성벽 위에 세워져 있었다.그러나 최근 문호재 보호차원에서 비각을 세우면서 성곽 안쪽으로 5~6M 옮기고 비각을 지어 그안에 잘 보존하고 있다.그런데도 현장을 취재하지 않은 모지방지엔 몇 년전에 찍은 성벽위의 사적비사진을 버젓이 올려놓는 대담한 뱃장을 보이고 있다. 헌종 12년(1846)에 세운 비석으로 남고진 설치와 산성보수 내력이 기록돼 있다. 비문의 내용은 ‘전주부성 남쪽 남고산에 견훤의 고성터인 남고산성이 있는데 이곳에서 만마관(지금 남관 죽림 온천지나
슬치에 가장 가까운 오른쪽 주유소로 추정됨)까지는 사슴 뿔처럼 첩첩 산줄기로 이어진 천혜의 요새로 임진왜란때 소모사 이정난이 전주성을 지키되 외각지세(사슴 뿔처럼 양 옆으로 겹겹이 진을 쳐 방어하는 진법)을 베풀어 왜적이 처 들어 올 수 없도록 하였다. 영조 10년(1734) 관찰사 조현명이 완산부성을 증축 한 후에 여기에 산성을 다시 쌓으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임기가 만료되어 떠나고 순조11년(1811)에 관찰사 이상황이 수축을 시작하여 후임으로 부임한 관찰사 금풍군 박윤수에 의해 남고진이 완성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비문은 최영일이 짓고 당시의 추사 김정희에 버금가는 이고장의 명필 창암 이삼만이 글씨를 썼다. 비신의 크기는 54×130×27㎝이다.
< 남고사(南固寺)와 남고사지(南固寺址) >
삼국시대 사지 지방 기념물 72호, 완산구 동서학동 2가 724(남고산성 남고사길 77)
남고사는 남고산성 내에 있는 사찰로 「동국여지승감」에 「남고사 재 만경대후-南高寺在萬景臺後」라 한 것으로 보아 조선조 전기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문무왕 8년(668)에 보덕화상의 수제자 명덕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 제3권 보덕이암(普德移庵)조에 「명덕창연구사-明德創燕口寺」라 되어있다. 또 조선 초 「동국여지승람」에는 남고연국사(南高燕國寺)라고 불렸다고 되어있다.(여기서 연국이라는 명칭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로 산성 사찰에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남고사는 원래 연구사(燕口寺)라 했던 것을 산성과 관련하여 연국사로 바꾸어 부르다 그 뒤 남고사(南高寺)로 바뀌어 조선 성종 때 까지 불리우다가 순조 때 남고진(南固鎭)설치와 때를 같이하여 남고산성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여 남고사(南固寺)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정면과 측면의 중앙어간에는 주간포(柱間包)2좌씩, 그 밖에는 주심(柱心)과 주간(柱間)에 1좌씩의 공포를 기구하였다.
법당 내에는 나무로 조성된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아미타불 좌상과 약사불 좌상이 모셔져 있는데 모두 조선후기에 조성된 불상이다. 석가여래좌상을 육계에 나발이고 얼굴은 세로로 약간 긴 사각형 모양의 각진 얼굴을 하고 있으며, 눈은 가늘게 뜨고 얼굴에 비해 코가 크게 조각되어 둔한 느낌이 들게 한다. 또한 목이 짧아 약간 답답한 느낌을 준다. 삼도가 있고 통견의 법의가 갑옷처럼 둔중한 모습이다. 손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으며 왼손을 만들어 끼워진 형태로 결과부좌를 하고 있으며, 앉은 높이 118㎝이고 무릎 폭은 92.6㎝이다.
< 만경대(萬景臺) 정몽주 우국시 각석(憂囗詩 刻石) >
조선시대 각석,완산구 동서학동 2가 724(남고산성 남고사길 77)
남고산성 서문 오른쪽 만경대에서 천경대 쪽으로 성벽을 따라 5-6m 내려가다 왼쪽으로 철책으로 막아 놓은 바위에 새겨진 고려말 충신 정몽주의 우국시로 일명 망향가(望鄕歌)라고도 하고 이런 연유로 개성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만경대(萬景臺)를 만경대(望京臺)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성계가 조선조 창업에 앞서 고려우왕 6년 (1380) 9월에 당시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 운봉 황산(荒山)에서 왜구 아지발도의 무리를 섬멸하여 이른바 황산대첩의 승전보를 가지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조가 살았던 전주에 들러 종친들을 오목대에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의기충천한 이성계가 한나라 고조가 한나라를 세우겠다는 큰 포부를 담아 불렀다는 대풍가(大風歌)를 부르자, 당시 종사관으로 동행하였던 정몽주가 이성계의 내심을 간파하고 비분강개하여 홀로 말을 달려 만경대에 올라 비분강개한 마음을 임금(우왕)이 계신 북쪽을 바라보며 시를 읊었다고 전해진다. 이시를 영조 22년(1742) 남고진장으로 있던 김익수가 새긴 것이라고 한다. 혹자는 글씨의 체가 남고진 사적비의 이삼만의 글씨와 유사하다고 창암 이삼만이 썼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때 읊은 우국시는 다음과 같다.
천인강두석경횡(千仞崗頭石逕橫) ‘천길 바윗 머리 돌길로 돌고 돌아,
등임사아부승정(登臨使我不勝情) 홀로 다다르니 가슴 메는 시름이여,
청산은약부여국(靑山隱約扶餘國) 청산에 깊이 잠겨 부여국을 다짐했건만,
황엽빈분백제성(황엽빈분백제성) 누런 잎은 백제성에 흩날리어라,
구월고범수객자(九月高凡愁客子) 구월의 바람은 높아 나그네 시름 짙고,
백년호기오서생(百年豪氣誤書生) 한평생 지닌 호기는 서생으로 그르쳤구나,
천애일몰부운합(天涯日沒浮雲合) 하늘가에 해는 기울고 뜬구름은 합해지는데,
교수무유망옥경(矯首無由望玉京) 속절없이 고개 돌려 옥경만 바라보네’
< 밤나무 >
참나무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교목으로키가 15~20m이며 열매(밤)를 얻기 위해 널리 심는데, 수피는 세로로 갈라진다. 잎은 긴 난형(卵形)으로 어긋나고 잎 가장자리에 뾰족한 톱니가 있다. 잎의 겉 맥은 가운데 맥에서 양쪽으로 17~25쌍이 뻗어 있다. 6~7월에 암·수꽃이 잎겨드랑이에서 미상(尾狀)꽃차례로 피는데, 암꽃은 꽃차례의 아래쪽에 3송이씩 무리지어 핀다.그러나 암꽃은 기다란 수꽃에 치어 알아보기가 힘들어 보통 암꽃이 있는지 조차 잘 모른다. 수꽃은 6장의 꽃덮이조각[花被片]과 10개 정도의 수술로 되어 있고, 암꽃은 6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씨방과 6개의 암술대로 이루어져 있다. 열매는 9~10월에 견과(堅果)로 익어 길이가 3㎝ 정도 되는 가시가 많이 난 밤송이가 되며, 그 속에 1~3개의 밤이 들어 있다.
가을에 열매를 따서 날로 또는 삶아서 먹거나 구워 먹으며, 과자나 요리에 첨가하기도 하고, 또 찹쌀·대추·잣 등과 함께 섞어 약밥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꽃이 필 때 수꽃을 따서 그늘에 말린 것을 율화(栗花)라 하고, 한방에서 율화는 목구멍에 생긴 연주창(連珠瘡) 치료에, 밤 껍질을 벗겨 말린 것을 건율(乾栗)이라고 하며 건율은 건위(建胃)·보신(補腎)·익기(益氣)에 쓰인다. 이밖에 민간에서는 밤을 검게 태워 참기름에 이겨 발라 탈모를 치료하고, 밤알을 달여 먹어 만성 구토와 당뇨병 치료에 사용하며, 코피가 멎지 않을 때 불에 구운 가루를 죽에 타서 먹었다고 한다. 또한 옛날에는 열매의 속껍질인 보늬를 가루로 만들어 꿀과 섞어 얼굴에 바르면 윤이 나고 주름살이 펴진다고 믿었다. 불에 데었을 때 밤송이나 줄기의 진액을 바르면 효과가 있다. 밤꽃에서 딴 꿀은 밤꽃 고유의 냄새를 지닌다. 밤꽃 고유의 냄새는 남자의 정액의 냄새와 유사하여 여자들이 좋아한다는 속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밤나무의 재목은 물과 습기를 잘 견디므로 철도 침목, 가옥 토대, 토목 용재, 선박재, 북의 동체, 다리 건설 등에 쓰인다. 변재는 암황색, 심재는 황갈색으로 경계가 뚜렷하고 나이테도 분명하다. 재질이 강인하고 결이 곧아 잘 쪼개지는 성질이 있어 공작하기 쉽고, 가지는 말뚝으로 널리 쓰인다. 밤나무는 과수로뿐만 아니라 꽃꽂이나 조경용으로도 널리 심고 있다. 물이 잘 빠지고 양지바른 사질(砂質) 양토에서 잘 자라며, 그늘진 곳에서는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건조한 기후에 강하고 토양 적응성도 높은 편이나 토양의 겨울에 동해(凍害)를 받기 쉬워 남향·남동향·동향으로 심는 것이 좋다. 밤나무는 밤나무혹벌과 같은 해충과 곰팡이에 의해 생기는 줄기마름병에 의해 큰 피해를 입는다.
한국에서는 언제부터 밤나무를 심어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낙랑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밤이 나왔다고 하며, 또한 1,700년 전 중국 진나라 〈삼국지 三國志〉의 마한편(馬韓篇)에 '굵기가 배만한 밤'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전부터 밤나무를 심고 밤을 식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국밤, 일본밤 약밤나무등을 심고 있다. 약밤나무는 중국 밤이라 하여 평안도와 함경도 지방에서 널리 심었으며, 특히 평양 근처에서 많이 심어 평양 밤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약밤나무는 밤알이 작고 속껍질이 잘 벗겨지며 단맛이 많아 군밤용으로 적당하나,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키가 작고 밤나무 혹벌에 대한 내충성이 약해 요즈음에는 거의 심지 않는다. 한국 밤도 밤나무 혹벌FP에 의해 극심한 피해를 입은 후 이 벌레에 잘 견디는 산대율(山大栗),광주조율(廣州早栗),중흥율(中興栗) 등의 품종을 심고 있다. 일본밤은 그 재배 기원이 정확하지 않은데 어떤 학자들은 한국밤과 일본밤이 같은 종(種)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밤으로는 밤나무혹벌에 대한 내충성이 강한 품종을 심는다.
뼈아프고 고생스러운 일을 다 겪어보았다는 뜻의 "밤송이 우엉송이 다 끼어보았다"라는 속담은 가시가 있는 밤송이와 갈퀴 모양으로 굽어서 찌르는 우엉의 꽃송이에서 나온 말이다. 밤을 땅에 뿌리면 밤에서 싹이 나와 꽤 자랄 때까지 밤껍질이 어린나무 뿌리에 계속 붙어 있다고 하여, 밤나무를 근본(선조)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겨 밤을 제상(祭床)에 올린다고 한다.
위패,신위,신주,사판(位牌,神位,神主,祠版)
밤을 심으면 싹이나와 꽤 자랄때까지 밤껍질이 어린나무 뿌리에 계속 붙어 있다고하여 밤나무를 근본(선조)를 잊지않는 나무라여겨 제사상에 올린다고한다.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 중 씨가 하나인 대추는 임금을, 밤은 삼정승을,감은 육 판서를, 배는 기타 관속을 상징하기도한다.
또 밤 껍질은 알맹이가 다 삭아 없어질 때가지 변치 않고 속을 감싼채 보호해 준다. 그야말로 일편단심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간직하는 위패(位牌,神位,神主,祠版)를 밤나무로
깍는다. 그 이유는 육신은 버렸지만 영혼만은 변함없이 받들겠다는 살아있는 사람의 정표다.나에게는 누가있어 밤나무로 위패를 깍아 줄까? 살아있는 동안 밤나무에 이름이라도 새겨줄 사람 어디 없을까? 오늘 부터라도 일삼아 찾아 봐야겠다.
신주-죽은사람의 위패.일명사판, 흔히 밤나무로 위는 둥글게 아래는 모나게 만든 것으로 넓이 두치(6cm) ,길이여덟치(24cm) 정도이다.
누구에겐가 아무것도 줄 것이 없는 존재란 없다고 밤나무는 말한다. 그가 내게 무언가 주지 않아도, 내가 그를 발견하고 느끼며 그에게 감사할 때, 그는 내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 된다고.
나는 누구에겐가 무언가를 느끼게 하고 감사하며 귀한 선물이 되는지 나는 나에게 되물어 봤으나 명쾌한 대답을 얻을 수 가 없다. 나는 밤나무처럼 선물을 줄 수 없다.
* 참고
지방(紙榜)-종이로 만든 신위(神位)
신위-신령이 의지할 자리 지반 따위
위패-단,묘,원,사(壇,廟,院,寺)에 모시는 신주의 이름을 적은 나무로 목주, 위판, 영위(木柱, 位版, 靈位)라고도한다.